글로벌 제조업 공급망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가속화된 자국 중심 제조 전략, 미중 무역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전 세계적인 리스크 속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무역 전략도 급변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중국, 베트남 등과 비교해 왜 한국이 더 취약한 제조국인지, 구조적인 요인을 중심으로 분석합니다.
1. 수출 편중 심화: 대미·대중 의존도 ‘쏠림 현상’
한국의 수출 구조는 매우 집중적입니다. 전체 수출의 약 40%가 미국과 중국에 집중되어 있으며, 품목으로는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등 특정 산업군에 쏠려 있습니다. 이는 외부 환경 변화에 대한 민감도를 높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이 중국에 대한 반도체 장비 수출을 금지했을 때, 한국 기업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중국 내 생산시설에 대한 제약 우려로 긴급 대응책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양대 축' 중심의 수출 구조는 미중관계에 따라 극단적인 리스크에 노출되며, 정책 하나가 수천억 원의 손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면 베트남은 수출시장을 미국, EU, 일본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으며, 가공무역 위주이기 때문에 완제품에 대한 직접 제재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중국은 자체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공급망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방어력이 높은 편입니다. 한국처럼 특정국 의존도가 큰 국가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2. 공급망 외부 의존도: 소재·장비 국산화 미비
한국의 대표 산업인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산업은 고부가가치를 창출하지만, 소재와 장비 부문에서는 여전히 해외 의존도가 높습니다. 대표적으로 반도체용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에칭가스 등 핵심 소재는 일본과 미국에서 수입하며, 제조 장비 역시 미국 ASML,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등 해외 기업에 의존합니다.
이는 외부에서 규제가 가해질 경우 대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되며, 실제로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당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비상 대응 체계에 돌입했습니다. 기술력이 있음에도 외부 공급망 없이는 생산이 불가능한 구조는 근본적으로 위험합니다.
중국은 최근 ‘제조 2025’ 전략을 통해 반도체·배터리 등 핵심 부품의 자립을 추진 중이고, 베트남은 외국계 자본을 다수 유치하면서 공급망 분산 효과를 자연스럽게 확보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기술 고도화는 빠르지만, ‘공급망 내재화’에서는 아직 속도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3. 무역 리스크 대응 속도: 민관 시스템의 비효율
한국 정부는 통상 전략과 FTA 체결에서는 선진국 수준의 체계를 갖췄지만, 돌발 변수에 대한 민관 협력 대응은 느리고 경직된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 수출 규제 당시에도 초기 수주 기업들은 정부의 가이드라인 없이 개별적으로 대처해야 했고, 후속 대응 또한 정책 발표는 있었지만, 실무적 실행 속도는 늦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중국은 국가 산업 전략과 통상 정책을 일괄 통제할 수 있는 체계가 있어 위기 시 빠르게 대응하며, 베트남도 외국계 기업에 대한 유연한 조정 능력을 갖추고 있어 국제 협상에서 실무적인 유연성이 높습니다.
반면 한국은 중앙정부 주도형 정책 결정이 많고, 민간 기업과의 정보 공유 시스템이 체계화되지 않아 일선 기업이 정책 방향을 사전에 예측하거나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위기 대응의 시간 지연과 시장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4. 고부가 산업일수록 충격 크다: 기술국의 딜레마
한국의 수출 주력 품목은 고부가가치 산업입니다.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선박 등은 세계 시장 점유율이 높지만, 이와 동시에 국제정치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산업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세 도입, 중국의 희토류 수출 제한 등은 고기술 중심 국가에 직접적인 타격을 줍니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은 의류, 신발, 식품 등 비교적 민감도가 낮은 산업에 집중하고 있어 무역 리스크 발생 시 대체 수출처 확보가 용이하지만, 한국은 특정 산업군 의존도가 높아 단일 정책에도 산업 전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결국 기술 강국일수록 글로벌 질서 변화에 더 큰 영향을 받는 역설에 직면한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 기업은 제품 경쟁력 강화와 함께 외부 정치·통상 리스크에 대한 내성과 분산 전략을 동시에 추진해야만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해집니다.
결론
같은 아시아 제조국이라 해도, 한국은 수출 집중도, 공급망 의존도, 정책 대응 속도, 산업군 민감도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더 위험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부가가치 산업을 보유한 것은 자랑이지만, 그만큼 외부 충격에 민감하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앞으로는 단순 수출 확대를 넘어서, 시장·산업·공급망의 분산과 내재화, 그리고 정부와 기업 간의 긴밀한 리스크 대응 시스템을 구축해야만 ‘위험한 제조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